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문단 편집) === 전개 === [[파일:attachment/345_soviet_afghanistan_war_1.jpg]] '''본격 [[제2차 세계 대전]] 총기 박람회.'''[* 소련-아프간 전쟁 당시 아프간 무자헤딘들은 자국이나 [[파키스탄]]에서 들여온 무기들로 싸웠다. 대부분의 무기들이 2차대전 때 사용된 [[영국]], [[소련]], [[나치 독일]]제 무기가 많았다.] [[파일:attachment/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mj.jpg]] 노획한 무기를 들고 사진을 찍은 소련군.[* 후술할 총기 종류도 구식 총기들이며, [[텔냐시카|둘이 입고 있는 속옷이 현재 러시아군에서도 입고 있는 보급품]]이다.] 오른쪽 총구를 하늘로 향해 들고 있는 소총은 [[리-엔필드]] 소총이고, 또한 들고있는 [[DP-28]]도 노획한 것이다. 소련제 무기이긴 하지만 이때 당시 소련군은 DP와 RPD 등 [[바실리]] [[덱탸료프]]가 개발한 [[기관총]] 총기들을 모두 퇴역시키고, [[칼라시니코프 기관총|PKM]]나 [[칼라시니코프 경기관총|RPK]]로 교체한지 오래된 시점이었다. 심지어는 리-엔필드의 바로 이전 세대 소총인 [[마티니-헨리 소총]]와, 20세기 무기도 아닌 [[제자일]]도 현역으로 징발되어 쓰였다. 공산 정권 수립 후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에 항거하던 무자헤딘들은 소련군이 침공해오자 소련군을 공격하며 게릴라전에 나섰다. 이들은 산악지형이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지형을 이용해 산악전 대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소련군을 게릴라전 등으로 공격하여 사상자들을 냈다. 한편으로 무자헤딘은 소련군뿐만 아니라 소련이 세운 친소 카르말 정부군도 동시에 공격하였다. 물론 소련군 역시 병력을 동원하여 무자헤딘 토벌에 나섰으나, 무자헤딘쪽 병력규모도 상당한데다 애초에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입장이라 소련군이 기본적으로 불리했다. 게다가 소련이라는 외세의 점령에 카르말의 공산 아프간 정부군 구성원들도 크게 동요하면서 무더기로 탈영해 침공 직후인 1980년 1월에는 100,000명이던 아프간 공산정부군이 6월에는 고작 30,000명만 남게 된다. 탈영한 병력들은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들고 반군에 가담, 반정부 진영의 화력과 전투력, 머릿수를 폭발적으로 늘려줬다.[* 이후 전쟁 기간 내내 소련과 아프간 공산정부가 군인들의 봉급을 올려주거나 빠른 승진을 제안하는 등의 당근을 써서 어떻게든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전쟁 전 기간 동안 반군이 사용한 무기의 80%가 소련군과 아프간 공산정부군에게 노획한 것일 정도로 군대의 이반은 심각한 문제였다.] [* 게다가 소련의 대리인인 카르말의 대응도 매우 한심했는데,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비상사태에 자신이 속한 상대적으로 온건 사회주의 분파인 파르참파(깃발파)가 군부에서 열세에 처해있고 장교 다수는 강경 스탈린주의 추종 분파인 할크파(인민파)에 충성한다는걸 뻔히 알고도 권력욕에 미쳐 할크파 장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할크파 장교들 다수가 급하게 제거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부군의 사기와 조직력은 크게 저하됐다. 한 술 더 떠서 이에 일부 할크파 장교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무자헤딘에 가담해 보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경한 사회주의자들이라 아프간 이슬람교 신앙과 충돌을 자주 일으키던 다수 할크파 장교들의 종교 핍박에 질려 아프간 공산정부군의 수많은 농촌 출신 징집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영해 전향하는 경우가 많기야 했다. 물론 파르참파의 방식대로 조금 온건하게 나서도 아프간인들이 사회주의에 저항하지 않는게 보장이 안됐다. 사우르 혁명 이후 할크파 장교들은 강압과 폭력으로 급진적인 사회주의를 징집된 사병들에게 억지로 주입해서 탈이 나고 하피줄라 아민 정권 당시에 이들이 군부 다수로 올라선 실로 암담한 상황이었던 것. 카르말은 이 와중에 통치를 완화하고 유연하게 타협해서 어떻게든 무마해보기는커녕 권력에 눈이 멀어서 그나마 죽이건 밥이건 장교단 중핵을 형성하기야 하는 할크파 장교들마저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있을 수 있던 선택지들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수를 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아흐마드 샤 마수드나 압둘 하크, 이스마일 칸, 압둘 라술 사아프 등과 같이 아프간내 무자헤딘 조직들을 지휘한 여러 지도자들의 활약상 또한 두드러졌는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아흐마드 샤 마수드]]였다. 마수드의 활약지가 소련 보급로 위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마수드는 주요 거점에 병력을 남겨두고 전투 발생 시 해당 지역에 기동부대를 보내어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애용하여 친소 카르말 정권과 소련군을 속을 끓이게 만들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북동쪽으로 70km 떨어진 판지시르 계곡(Panjshir Valley)에서 마수드의 무자헤딘 군대를 토벌하기 위한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의 대규모 공세가 무려 9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전투 과정에서 마수드 휘하의 무자헤딘 병사들도 만만찮은 손실을 입었으나 결국 제압에는 실패했다. 1982년에 행해진 5차(12,000여 명 동원), 6차 공세 모두 합쳐 소련 측에서 3,00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와중에 공산 아프간군 1,000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수드는 소련군과 공산 아프간 정부군 측에서 노획한 물자와 서방에서 근근히 전해주는 원조물자와 무기,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소 항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파일:attachment/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sniper.jpg]] 1984년 7차 공세에서는 소련-공산 아프간 정부군 21,000여 명이 동원되었지만 5,000여 명의 무자헤딘을 당해내지 못하고 2,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돌아갔다.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아프간군 500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했고 공산 아프간 정부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소련 측은 결국 1986년에 공세를 중단, 1988년이 되어서야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문제는 북부 판지시르 계곡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전선 상황들도 소련군과 공산 아프간 정부군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헤라트]] 등 북서부 아프간 지역에서는 [[이스마일 칸]]이 지휘하는 무자헤딘 반군들[* 본래 이스마일 칸은 본래 아프간 정부군 장교 출신이었으나 소련 침공 이전인 헤라트 소요사태 당시 공산 아프간 정부군이 헤라트 시민들을 겨냥해 저지른 시민 학살에 분노하여 군에서 탈영, 아프간 정부군을 적으로 돌리면서 이후 아프간 정부로부터 위험 인물로서 지명수배를 받는 반정부군의 지도자가 된 상황이었다.]이 헤라트 지역 공항에 주둔해있던 소련 공군을 습격하여 공항에 배치된 소련군 전투기와 헬기 20여대를 폭파시키기도 했고, 1985년 후반기에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3km 떨어진 자와를(Zhawar)에서도 소련군과 무자헤딘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 무자헤딘은 [[동굴]]을 뚫어 창고와 모스크, 의료시설을 지어놓고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 || [[파일:attachment/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s1s.jpg|width=100%]] || [[파일:attachment/Afghanistan1985.jpg|width=100%]] || 1985년 후반의 1차 공세에는 카르말 아프간 정부군이 주축이 되어 무자헤딘에게 무리한 공격을 가했다가 패배했고 그 결과 오히려 무자헤딘의 사기만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6년 초에 가해진 2차 공세에는 12,000여 명의 소련-공산 아프간 동맹군(이 중 2,200여 명이 소련군)이 다시 재차 공격을 가해서 어찌저찌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다시 후퇴해버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공세때마다 소련군의 병력이 충분히 동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산 아프간 정부군도 물론 나중에 탈레반이 쳐들어올 때마다 도망가기 바빴던 미국의 아프간 전쟁 당시 [[아프가니스탄군]]에 비해서는 나았지만 근본적으로 외국군의 지시로 움직이는 도구에 불과했기에 후일의 아프간 정부군과는 다른 이유로 전투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주축은 소련군일 수밖에 없었다.] 1987년에는 파키스탄 남부 국경지역의 아르간다브(Arghandab)에서 나지불라 아프간 정부군[* 이때 카르말이 대통령직에서 사직하고, 나지불라가 아프가니스탄 친소 정권의 대통령이 되면서 나지불라 정부가 출범했다.]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가며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으나 결과적으로 물라 나키브가 이끄는 무자헤딘 군에 대패하여 1,7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포로, 이탈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나 소련이 맞고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미국과 맞설 수 있는 강대국인 소련이다 보니 모든 전투에서 소련 측의 사상자보다 무자헤딘 측의 사상자가 더 많았다. 10년 동안의 전쟁에서 소련군은 15,000명이 전사했는데 무자헤딘의 전사자는 6배에 달하는 90,000명이었다. 소련군과 무자헤딘이 정면대결한 전투에서는 무자헤딘의 전사자가 20배 이상이었다. 1987-1988년 사이 겨울에는 소련군 20,000명, 아프간 공산군 8,000명이 파키타 주(Pakita Province)에서 무자헤딘 20,000명에게 대규모 공세를 펼쳐서 무자헤딘 3천 명을 죽이는 등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승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전도 전술적으로는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동년 후반에는 무자헤딘 측이 공세로 나서, 일명 '화살' 작전을 발동,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카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라그만 주(Laghman Province) 지역이다.]에서 아프간 정부군을 대패시키기도 하였다. 게다가 코스트 주(Khost Province)에서는 10년에 걸쳐 소련-공산 아프간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결국 소련 측이 퇴각하는 일도 있었다. 참고로 소련군은 620,000명 정도의 대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시켰는데도 전과가 크지 않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전체의 '연인원' 개념이다. 전쟁 기간 동안 평균적으로 80,000~100,000명 정도의 소련군만이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였고, 내무부 보안군과 KGB의 특수부대는 다 합쳐봐야 10,000명 수준이었다. 그리고 실제 전투임무를 수행한 건 이 10,0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일의 미군과 전쟁 수행방식부터 패배까지 완벽하게 똑같이 돌아갔다. 미군도 연인원 기준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 775,000명이 동원되었으나 최대 유지병력은 120,000명에 실제 전투병력은 10,0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따지고 들면 미군이 소련군보다는 전투병력이 더 많기는 했다. 이쪽은 다국적군의 지원도 받고 있었다.] 더구나 광활한 아프가니스탄의 각 주요 도로와 거점지역으로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던 소련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생각하면 이것도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간은 외부에서 막대한 지원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현지에 나간 소련군 장군들도 모스크바에 전차와 전투기 중심이 아닌 200만명이 넘는 보병부대와 이를 지원하는 보급부대를 통하여 요충지나 도로 같은 점과 선 뿐만 아니라 면인 지역을 장기간 장악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고 모스크바 군 장성들도 이에 동의하고 전략을 전면 수정하는 안을 보고 했으나 소련의 경제적, 외교적 부담으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이는 20년후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고전하면서 똑같이 고려하던 방안이고, 마찬가지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자헤딘과 소련군, 아프간 정부군 간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지속되었다. 이렇게 끝날 기약 없이 전쟁이 장기화되자 무자헤딘의 화력과 역량, 보유 장비 역시 일취월장했다. 무자헤딘에 귀순한 아프간 친소 정부군의 탈영병이 노획한 소련제 전차를 몰고 정부군 병영을 습격하는 게릴라전에서는 보기 드문 일까지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